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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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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재야’ 장기표, 암 투병 끝 별세: 노동·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떠나다

2024년 9월 22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노동·민주화 운동가로 알려진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동안 담낭암 투병을 이어오던 장기표는 이날 오전 1시 35분께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국립암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장기표의 뜨거운 삶은 막을 내렸다.

그의 삶은 투쟁과 헌신의 연속이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에 맞서며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투신한 그는 수차례의 수감과 수배,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정치적 제도권에 진출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장기표는 끝까지 ‘영원한 재야’로 남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1. 장기표의 삶과 업적

1.1 어린 시절과 초기 교육

장기표는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판적 사고와 사회 정의에 대한 열정을 품었다. 마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군사 정권 하에서 탄압과 억압이 지속되던 시기였고, 장기표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사건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었다. 전태일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항거하며 자신을 희생했고, 이는 장기표가 노동운동에 깊이 투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장기표는 대학을 중단하고 노동자와 함께 현장에서 투쟁하며,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

1.2 전태일과의 만남: 노동운동의 시작

장기표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그가 전태일 열사와의 깊은 인연을 맺은 이후였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한 후, 장기표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그의 시신을 인수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을 맡았다. 이는 그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장기표는 그 이후로 노동자들의 권리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그는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모아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함으로써 '전태일 평전'이 집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태일 평전'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기록물로 남았다.

장기표는 이후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전태일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함께 노동운동을 도왔다. 이소선 여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1.3 수감과 수배의 연속: 불굴의 민주화 투쟁

장기표의 삶은 그야말로 투쟁과 수감의 연속이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처음으로 구속되었으며, 이후에도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수감되었다. 총 9년간의 수감 생활과 12년간의 수배 생활을 이어가며 장기표는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1970~80년대, 장기표는 군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저항했다. 그의 활동은 주로 비합법적이고 지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동료들은 장기표를 가리켜 "불굴의 의지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인물"이라 평했고, 그는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기억된다.

장기표는 수감 생활과 도피 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유에 대해 "나는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곤 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신념과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1.4 진보정당 운동과 제도권 정치의 시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장기표는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1984년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민통련(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앞장섰으며,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등을 창당하며 진보정당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장기표의 제도권 정치 진입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대, 16대, 17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그리고 19대와 21대 총선까지 총 7차례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그는 21대 총선에서는 보수 정당(당시 미래통합당)의 후보로까지 출마했으나, 여전히 국회 입성에는 실패했다.

이처럼 수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장기표는 제도권 정치로의 진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장기표는 제도권에서의 권력을 얻기보다는, 정치적 이념과 가치를 지키는 데 집중한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영원한 재야'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이는 그가 추구한 가치와 이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남았다.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2. 장기표의 마지막 길: 암 투병과 담담한 마무리

장기표는 2024년 7월, 페이스북에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리는 글을 게시하며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당시 글에서 담낭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며,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치료가 어려운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다"며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았으며, 암 투병 중에도 저술 활동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의 투병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으나, 장기표는 끝까지 침착하고 평온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병상에서도 "여러 어려운 사정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보답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고 전하며,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3. 장기표의 정치적 유산: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장기표는 최근 몇 년간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하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앞장서며,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 정당의 국고보조금 폐지,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특권을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봉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특권 폐지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2023년부터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며, 국회의원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 정치개혁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여전히 제도적인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기표는 국회의 특권과 부패 구조를 비판하며, 정치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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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기표의 미완의 꿈: 국민 행복을 위한 사회 건설

장기표는 평생 동안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아를 실현하고, 각자의 소질과 취향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장기표는 한국 사회가 불평등과 부패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꿈은 비록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장기표는 그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가 남긴 정치적 이상과 가치는 후대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5. 장례와 유족: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지는 마지막 길

장기표의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는 그가 평생 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인물로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의미 있는 절차로, 많은 이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할 예정이다. 발인은 9월 26일에 거행되며, 장지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마련될 예정이다.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두 딸 하원, 보원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되었으며, 조문은 9월 22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기표 별세 사망 프로필 나이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6. 결론: 장기표, 그가 남긴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유산

장기표는 평생을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는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장기표가 남긴 정신과 가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한 사람의 정치적 활동을 넘어서, 대한민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영원한 재야'로 불리며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간 장기표, 그는 우리 사회에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새기고 떠난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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